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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세상,

sol1324 2023. 11. 7. 22:40

 


 

하얗기만 한 세상 위로

동아가 땅 끝을 물고 숨을 쉬는 꿈을 꿉니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으니 내 마음은 그제야 안식을 찾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당신보다도 나를 더 사랑해 줄 사람이에요. 내 하늘은 이미 구물거리는 어둠으로 저물어 저 멀리 흘러가버렸지 않나요. 질렸어요. 매번 나만 보면 웃으며 달려오던 투박하고 두꺼운 발걸음 소리도 듣기 싫어서요. 무엇을 하든 내가 우선시되는 상황들이 숨 막혀요. 이제는 당신을 챙기세요. 아,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때문에 내가 내 몸을 숨기고 다칠까 봐 노심초사하는 일들이 이제는 없겠어요. 또 다른 정인이 생긴 사람을 어떻게 당신의 최우선으로 둘 수 있나요? 말도 안될 일이지. 그러니 우리가 질리도록 입에 올리던 것들은 오늘로써 전부 버리자고. 미련하게 굴지 마세요.

한없이 무덤덤한 얼굴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끊음도 없이 숨을 내뱉을 생각도 않고, 외운 대로만 이야기하면 될 일이었다. 우선시 되는 것들로 인해서 내려놓아야만 했던 것들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다. 질린다는 소리 하나로 모든 추억을 거친 발로 흙이나 덮어내듯이 덮어냈다. 두 시선이 얼굴을 똑바로 담아내지를 못해서, 어긋난 시선이 혹여나 우스워 보이지는 않을까 눈을 꾹 감아냈다. 누군가의 감정은 눈에서 가장 잘 드러남을 그 누구보다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뒤를 돌아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공간으로 도망치듯 달려간다. 오늘따라 시린 목구멍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지. 당황한 듯한 질문과 저를 급박히 찾아오는 걸음들에 지쳐서 그 말을 끝으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날 준비를 마쳐냈다.

 

 

"이제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나를 걱정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잖아. 하나로 뭉쳐진 가족 같은 집단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니까.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담담한 얼굴로 당신들을 마주하니 장난이나 치지 말라며 내 어깨를 툭툭 치네요. 이제 더 이상 내 모든 진심을 장난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빵을 내어줄 아량도 바닥났어요. 언제까지 난 내 죽음을 두려워하는 하나뿐인 동생에게 불안감을 줄 수밖에 없나요? 사랑과 애정으로 내게 되돌려주는 것에 기대를 품는 것도 더 이상은 못할 짓이죠. 나는 그걸 잘 알아요. 그러니 당신들이 날 찾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그만두면 될 일 아닌가 싶었어요.

무식한 방식들로 인연들을 단절하는 행위가 어색해 하나부터 끝까지 이음새가 거칠고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랑을 이제는 더 이상 되돌려줄 힘조차 남질 않았기에 그 두 마디를 끝으로 이리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

.

땅을 발로 더듬듯 걸어갔다.

시린감과 녹아내리는 통이 느껴지는 목구멍 위로 무언가 울컥 차오르다가,

다시 억지로 삼켜내면 비릿한 쇠맛이 느껴진다.

...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게 얼마나 됐더라, 이곳에 혼자 숨어 있었던 날은 또 얼마가 되었지.

 


 

 

몸이 언제부턴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 잠을 많이 자지 않아도 누군가와 함께하던 아침이 행복했고, 공기를 코와 입으로 들이마쉬며 애정을 쏟아붓는 일은 나의 행복이었다. 옷을 입고 나가려 들어내는 팔이 떨리다 못해 축 처져 미동도 않기에 잠시간의 피로로 인한 것으로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 잦고 얕게 나오는 기침들에 자신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활짝 웃어 그 무엇보다 철저히 감춰내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일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엄마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러지 못한 것이라고. 작게 기침이 나오다가 점점 피고름을 머금고 입 밖으로 토해내기 시작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그 병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잘 챙기라고. ...시계를 전해줬던 노파는 어찌 그 모든 걸 잘 알고 있었던 거지? 약한 몸을 억지로 강하게 단련시켜 극한의 상황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 아직까지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만두질 못했다. 괜찮은 척도 한계에 다다르면 그 무엇보다 빠르게 눈치를 챌 사람을 위해 나는 무식한 말들을 메모장에 적어두고 밤잠에 들기 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죽이고, 외우기 시작했다.

.. 사랑하는... 사람..

이제 더.. 미련하게..

 

이미 시작되었다. 돌이킬 수 없을 병이 혹여나 당신들에게 전해질까 겁이 났던 나는 겁쟁이처럼 도망치기 시작했다. 눈은 뿌연 빛무리만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태인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죽음을 자처하듯 밖으로 나가 큰 나무 위에 기대 한참 숨을 고른다. 점점 제 아래로 목구멍에서 토해내듯 나온 핏물 웅덩이는, 직감을 현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를 사랑함으로 숨을 공유하던 것이 끊기길 바랐다. 내 죽음이 누군가와 이어져 잡아먹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사실..

그래, 사실.

 

부랑자님

 

 

상처투성이인 영혼만이 내가 가진 전부여도 날 여전히 사랑할 수 있나요?

당신이라면 그럴테죠, 날 여전히 사랑해 줄 테죠.

이리스의 마지막 숨결 中,